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2) 59

사랑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도종환 엮음 출판 나무생각 사랑 - 김용택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

오분간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도종환 엮음 출판 나무생각 오분간 -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 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버릴 生, 내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도종환 엮음 출판 나무생각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사랑을 하는 동안 추운 길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날이 있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오랜 침묵 때문에 힘들기도 하고 많이 외 로운 날도 있게 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일이 꿈 을 엮는 일과 같다면,..

추경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도종환 엮음 출판 나무생각 추경 - 허장무 이쁜 것들이 조금씩 상처 입으며 살아가겠지 미운 것들을 더러는 상처 입혀가면서 말야 바람 부는 아침 저녁으로 햇살 파리한 들판 산서어나무 가지를 흔드는 바람의 전언(傳言) 눈시울 붉히며 그래도 그대만을 사랑했던가 싶게 지성으로 푸른 하늘 아래 전신으로 생을 재는 풀벌레의 보행 가을이 와 비로소 고독해진 솜다리꽃 같은 이쁜 것들이 상처 입으며 조금씩 더 아름다워지는 세상 이쁜 것들도 사는 동안 조금씩 상처 입으며 살아간다. 더러는 미운 것들을 상처 입혀가면서. 상처받지 않고 가는 삶은 없다. 나무가 가만히 있어도 바람이 와서 가지를 흔든다. 더없이 아 름답고 예뻐서 상처 하나 없이 티 하나 없이 살아갔으면 하고 바 라지만 그건..

상한 영혼을 위하여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도종환 엮음 출판 나무생각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부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의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상한 갈대도 넉넉한 모습으로 흔들리며 서 있..

동백꽃을 줍다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도종환 엮음 출판 나무생각 동백꽃을 줍다 - 이원규 이미 져버린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닌 줄 알았다 새야, 시든 꽃잎을 물고 우는 동박새야 네게도 몸서리쳐지는 추억이 있느냐 보길도 부용마을에 와서 한겨울에 지는 동백꽃을 줍다가 나를 버린 얼굴 내가 버린 얼굴들을 보았다 숙아 철아 자야 국아 희야 철 지난 노래를 부르다 보면 하나 둘 꽃 속에 호얏불이 켜지는데 대체 누가 울어 꽃은 지고 또 지는 것이냐 이 세상의 누군가를 만날 때 꽃은 피어 새들을 부르고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 잊혀질 때 낙화의 겨울밤은 길고도 추웠다 잠시 지리산을 버리고 보길도의 동백꽃을 주우며, 예송리 바닷가의 젖은 갯돌로 구르며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지 않는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라는 ..

사랑법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도종환 엮음 출판 나무생각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 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사랑이 떠나갈 때 침묵하기란 쉽지 않다. 피는 꽃, 지는 꽃을 보 면서 아파하고, 하늘을 보고 원망하고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떠나는 자를 억지로 ..

작은 것을 위하여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도종환 엮음 출판 나무생각 작은 것을 위하여 - 이기철 굴뚝새들은 조그맣게 산다 강아지풀 속이나 탱자나무 숲 속에 살면서도 그들은 즐겁고 물여뀌 잎새 위에서도 그들은 깃을 묻고 잠들 줄 안다 작은 빗방울 일부러 피하지 않고 숯더미 같은 것도 부리로 쪼으며 발톱으로 어루만진다 인가에서 울려 오는 차임벨 소리에 놀란 눈을 뜨고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가슴은 떨리지만 밤과 느릅나무 잎새와 어둠 속의 별빛을 바라보며 그들은 조용한 화해와 순응의 하룻밤을 새우고 짧은 꿈속에 저들의 생애의 몇 토막 이야기를 묻는다 아카시아꽃을 떨어뜨리고 불어온 바람이 깃털 속에 박히고 박하꽃 피운 바람이 부리 끝에 와 머무는 밤에도 그들의 하루는 어둠 속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날빛을 맞으며 가을..

호수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도종환 엮음 출판 나무생각 호수 -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고요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가을 밤 잎이 지는 호숫가에서 밤을 새운다. 밤을 새우며 너를 기다리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것은 어길 수 없는 약속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기다리면서도 나는 사랑 때문에 울지 않는다. 조용 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너를 사랑하는 동안 내 마음은 ..

저녁산책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시 도종환 엮음 출판 나무생각 저녁산책 - 배창환 아들아, 너와 나의 인연은 참으로 깊다. 언젠가 신점(神占)으 로 소문난 월항 할매 찾아 내 손바닥을 펼쳤을 때, 너는 그 여 자의 확언에 의해 내게 운명적으로 점지될 생명이었다. 나는 너를 여기 이 앵무동 마을까지 데리고 왔다. 이 마을은 내가 꿈 에도 날아와 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나 첫눈에 이 집은 내 집 이었고 너의 집이 되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났다. 너는 지금 나와 함께 적송 기울어진 언덕 구름 속을 달리고 있는 이 저녁을 세상 마지막날까지 갖고 가리라. 너는 자전거 를 타고 나는 걷고 있다. 새로 지은 뒷집 건너 뒷집 똥개 두 놈 이 내가 발을 뗄 때마다 정확하게 두 번씩 짖어댄다는 사실을 알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