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어떤 사람들은 깨달음이라는 생각을 비웃는다. 나는 법에 관해 토
의하는 인터넷 채팅방에서, 사람들이 깨달음을 거론하면서 경멸적인
용어, 심지어는 화내고 모욕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은 아마도 깨달음을 오해하는 것 같다. 깨달음은 바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생긴 불타는 고통을 끄는 것이다. 모든 탄생, 성
장, 늙음, 죽음, 슬픔, 비탄, 비통, 절망의 불을 영원히 끄는 것이다.
깨달음을 비웃는 사람들은, 이 불을 껐을 때 절망의 차가운 암흑
속에서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내팽개쳐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일
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이 고통스런 내면의 불을, 문명의 단초가 된
불, 혹은 전깃불과 혼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리석음이라
는 고통스런 불이 꺼지고 나면, 칠흑 같은 겨울밤의 차디찬 공기가
여러분을 뒤덮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냉혹한 생기 없는 상태가 아니
다. 결코 그렇지 않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탄생, 성장, 늙어감, 죽
음, 슬픔, 비탄, 고통, 비통, 절망이 소멸되면, 그 결과는 완전한 평화
요, 완전한 고요요, 완전한 편안함이요, 표현할 수 없는 완전한 행복
이다. 마음과 감각이 100퍼센트 깨끗하고 순수하고 활력으로 가득
찬다. 깨달음은 내적인 빛이요, 내적인 밝음이요, 내적인 따스함이
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모든 번뇌들을 놓아버렸기에, 마음
과 몸이 경쾌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뿐한 느낌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무거운 머리, 무거운 가슴, 무거운 몸에 익숙하다. 그렇게 머
리가 가볍게 된다는 예상이 우리를 약간 불안하게 한다. 이 가벼움이
머리를 몽롱하게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무거움과 고통에 너무
나 익숙해 있기에, 놓아버렸을 때 어리둥절해질까봐 두려워한다.
그것은 내 친구의 경우와 비슷하다. 친구는 이직 후 커다란 기차역
옆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처음 그 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에는, 기
차 소리와 오가는 사람들 소리에 여러 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몇 년
후, 다시 다른 직장으로 옮겨간 친구는 다시 이사를 가야 했다. 그의
새 아파트는 아주 조용했다. 다시, 여러 날 잠 못 이루는 밤이 찾아왔
다. 시끌벅적한 것에 아주 익숙해져서, 소란스럽지 않으면 깊이 잠들
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 친구처럼, 우리는 마음이 무겁고 불
편한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것들이 사라지면 그것들을 그리워
할까봐 두려워한다.
우리는 상황은 내가 워싱턴 D. C.에 살 때 신문에서 보았던 어떤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그 사람은 살인죄로 종신형을 살고 있었다.
10년 뒤, 모범수였던 그 사람은 가석방이 되었다. 어느 날 신문기자
가 그를 취재하러 찾아왔다. 기자는 "가석방 처분을 받아서 굉장히
기쁘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니오, 아닙니다. 가석방 얘기는 하지도 말아요." 그는 약간 흥분
하면서 대답했다. 그는 교도소 생활이 편안하다고 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특권을 누렸고, 교도소 생활은 외부의 삶과 같은 불안정이 없었
다. 그러나 그때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교도소의 폭력,
끝없는 제한, 간수들의 횡포에 정말로 익숙해졌을까? 교도소 담장
밖의 삶의 기쁨, 신선한 공기, 툭 터진 아름다운 풍경, 좋은 음식, 자
유로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을 그는 잊었을까? 자유가 오히려
이상하고 호소력 없는 그 담장 안의 조건에 그는 그렇게도 집착하게
되었을까?
깨달음을 비웃는 사람들은 교도소에 있는 사람과 같다. 그들은 자
신들이 가진 것에 집착한다. 그들은 불편함에 익숙해져서 생긴 편안
함과 헤어지기 싫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깨달음은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원
하는 모든 것이 끝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부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방이 물 천지인데
우물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갈망의 뿌리가 치성인데
무엇을 찾으러 돌아다니랴? (Ud Ⅶ.9)
무언가 잃어버렸을 때, 계속 찾는 법이다. 갖고 싶어하던 모든 것
을 남김없이 가졌다면, 더 이상 찾지 않는다. 여러분이 완전한 평화,
완전한 조화를 얻었기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평화와 조화 속에 살게
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다.
알아차림 확립의 긴 경(大念處經)의 끝 부분에서, 부처는 이 경에
설명된 방법 그대로 알아차림 명상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생에서 깨
달음을 성취한다고 보장했다. 만약 그 사람에게 미세한 족쇄들이 남
아 있어서 완전히 깨닫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적어도 깨달음의
세 번째 단계인 아나함(돌아오지 않는이)에 든다.(D 22)
부처의 이 말은 팔정도의 일부 제한적인 부분만을 실천하는 사람
이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뜻이 아니다. 깨달음은 계와 집중과 지혜의
모든 측면을 완전히 계발할 것을 요구한다. 이 다소 놀라운 약속은,
가끔씩 심심할 때 한 번씩 명상하면 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혹독한 헌신, 노력, 에너지와 참을성을 가
지고 명상할 것을 요구했다. 집중을 얻기 위한 노력은 완벽하게 청정
한 계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집중은 건전하고 하나의 대상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그리고 이 강력한 집중은 강력한 알아차림과 함께 계
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청정한 계율과 능숙한 집중의 지지
를 받아, 해탈을 가져다 주는 지혜가 생긴다.
그래도, 부처의 말을 비현실적인 약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떤 근거로 그렇게 의심하는지 궁금하다..발에
물 묻히는 것조차 싫어하면서 누구든지 올림픽 수영선수처럼 빠르게
헤엄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그런 사람들일까? 혹은 단 한 발짝
도 뛰지 않으면서 누구든지 42.195km 의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그런 사람들일까? 물론 부처의 약속은 한 번도 좌선
해보지 않은 사람, 혹은 단 1분도 호흡을 지켜보려고 시도해보지 않
은 사람에게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수년
간 좌선을 해왔지만 계율과 능숙한 집중과 지혜로 구성되어 있는 여
덟 단계를 모두 실천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공허한 약속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명상은 성실한 규율을 필요로 한다. 명상의 규율을 지키는 것은,
누군가를 감동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정적인 특성으로
인해 생긴 고통으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다. 부처의 길을
취미나 놀이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그것은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 부
처의 여덟 단계들은 배운 다음에 필요할 때만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
니다. 여러분은 여덟 단계를 자신이 필요로 할 때만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인생의 매 순간마다 그것들을 필
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수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부처의 길, 팔정도에 대한 여
러분의 알아차림이 완전한 상태여야만 한다는 마은 아니다. 만약 팔
정도에 대한 알아차림이 잘 안되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단순히 알아
차리지 못했음을 깨닫자마자 그 사실을 알아차려라. 부처의 길을 걸
어가기 시작한 여러분의 성공 여부는, 실제로 얼마나 알아차렸는지
가 아니라, 줄곧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얼마나 강력하게 유지했느냐
에 달려 있다. 팔정도에 대한 알아차림이 저절로 될 때까지 알아차림
을 잊지 않고 계속해갈수록, 옆길로 새는 일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계속 노력하다보면, 진도가 빨라질 것이다. 그러면 여러
분은 부처가 약속했던 그 제자가 될 것이다.
사방이 물 천지인데
우물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갈망의 뿌리가 치성인데
무엇을 찾으러 돌아다니랴?